[나사렛 예수의 죽음] 다섯째 마당: 빌라도에게 정죄 받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 다섯째 마당: 빌라도에게 정죄 받다
  • 김인철 목사(예슈아성서연구원 대표)
  • 승인 2019.10.0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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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아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예수아성서연구원 대표 김인철 목사

‘빌라도에게(빌라도 아래에서) 고난 받으사’

이 문장은 사도신경[1]에서 생전의 예수에 대한 유일한 묘사이다. 대부분의 개신교나 천주교가 속한 서방 교회와 달리, 동방교회에서는 사도 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살리려고 힘썼다는 복음서의 증언과 반대라는 이유에서이다.[2] 동방 교회에서 빌라도는 적어도 성녀의 남편이거나, 회개한 성자이다. 따라서 빌라도를 미화한 위서(pseudepigrapha)나 외경(apocrypha)은 대부분 동방 교회 계열에서 만들어졌다. 때로 이 문헌들은 저자의 이름이나 내용면에서 역사적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되기도 한다.

 

I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기원후 14-37년)가 기원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통치자로 임명한 군인이었다.[3]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직접 말해주는 유물은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비문이다.[4] 이름과 함께 비문에 새겨진 빌라도의 직책은 총독(procurator)이 아니라 유대의 사령관(Praefectus Iudaeae)이었다.

가이사랴 비문과 함께 빌라도가 실존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동전들이다. 빌라도가 기원후 29년, 30년, 31년 세 차례에 걸쳐 주조한 동전들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5] 또 한가지 증거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이다. 반지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1961년 헤로디온에서 발견되었다가 2018년에야 비로소 해독되었다. 그 반지는 빌라도에게 보내는 공물을 담당하는 신하가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6] 물론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었던 사실은 앞으로 소개할 요세푸스의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흔치 않은 그의 이름에 대해 신약 학자 윌슨은 이렇게 설명한다.

“본디오는 고대 로마의 족명(族名, nomen, 주로 둘째 이름에 해당-역자주)으로 혈통을 의미하며, 빌라도는 그의 후손이었다. 이것은 삼니움족의 이름으로 가장 유명한 부족 중의 하나였다. 삼니움족들이 로마에 정복당하고 흡수된 후에 본디오라는 이름은 로마 역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로마의 자유인이 쓰는 밀짚모자(pileus)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빌라도가 기마병 계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창병으로서 투창(pilum)과 연관되어 유래되어 왔다. 아마도 그 이름은 그의 조상들에게서 빌라도에게 내려왔고 오랫동안 그 이름의 의미를 상실했었다”.[7]

빌라도는 군인 가문 출신의 유대 사령관이었다.[8] 유대의 통치자로 부임하기 전에는 가문의 명예에 어울리게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유대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매사를 전투적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건이 황제의 형상이 그려진 군기를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들여보낸 일이다.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유대인들의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우상을 들여온 것에 분개한 유대인들이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시위대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완강한 태도에 한 발 물러서서 군기를 철수시켰다. 이후 그는 성전 금고에 보관된 ‘고르반’ 헌금을 수로 공사에 사용하여 또 한번 유대인들을 격분시켰다.[9] 마침 예루살렘에 와있던 그는 항의하는 시위대를 몽둥이로 해산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들이 몽둥이에 맞거나 짓밟혀 목숨을 잃었다.[10] 어쩌면 이 사건이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빌라도의 갈릴리인 학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11]

빌라도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는 사마리아인 학살 사건이다. 기원후 36년 사마리아의 어떤 예언자가 구세주를 참칭하면서, 사람들을 그리심 산으로 모았다. 그가 잃어버린 성전 기물을 찾아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 가려고 티라타바라는 마을에 모였다.

빌라도는 기병대를 보내 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게 사신을 보내 빌라도를 고소했다. 사실 관계를 파악한 비텔리우스는 빌라도에게 황제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도록 유대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결국 빌라도는 서둘러 로마로 떠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티베리우스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12]

빌라도에게는 아내가 있었다.[13] 5세기에 만들어진 소위 ‘파라도시스(전승)’에서 그녀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ula)로 알려졌다. 마태복음에서 그녀는 빌라도의 재판정에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선처하도록 호소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14] 이 구절은 나중에 그녀가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빌라도까지 신자가 되었다는 전승으로 발전했다.[15]

저 유명한 <빌라도의 보고서>와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가능성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매우 낮아 보인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빌라도가 칼리굴라 황제 시절 유배된 후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빌라도의 보고서는 후대의 전승을 극화하여 역사가 발레리우스 파테르쿠루스의 이름으로 발표한 위작으로 추정된다.[16]

이외에도 빌라도를 미화한 문헌으로는 <빌라도 행전>과 <지옥에 내리신 그리스도>가 들어 있는 <니고데모 복음서>도 있다. <파라도시스(전승)>에는 빌라도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전도하다가 참수형을 당했으며, 죽기 전에 기도를 올리자 하늘로부터 구원을 약속하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그의 목이 떨어지자 천사가 내려와 하늘로 가져갔다는 내용도 있다.

빌라도의 개종 과정은 콥트어 판 <가말리엘 복음서>에서 절정에 이른다. “빌라도와 그의 아내는 예수를 제 몸처럼 사랑하였다. 그가 예수를 채찍질한 것은 사악한 유대인들의 기분을 달래기 위함이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분노가 누그러지면 혹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고 그를 석방할 수 있지 않을까 함이었다(L. 모랄디, 662)”.[17]

 

II 빌라도 재판의 적법성

유대인에 대한 빌라도의 사법적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나사렛 예수처럼 로마 시민권이 없는 속주국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어떤 권리가 있었는지 먼저 살펴본다. 로마 법 연구가 라이얼(Francis Lyall)은 이렇게 말한다. “속주국에 있는 사람들(peregrini)은 로마인들이 아니었기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자의 지배 아래 있었고 로마 황제가 부여하는 무거운 세금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강력한 로마법 아래, 그들은 권리나 의무는 없이 로마법의 주관자로서가 아닌 법의 지배를 받는 대상들로 존재했다”.[18]

여기서 ‘의무도 권리도 없이 법의 지배를 받는 대상들로 존재했다’는 표현이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의 운명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은 예수처럼 유대인들의 고소로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지만, 로마 시민권자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는 요청이 허락되었다.[19] 더구나 바울의 경우는 속주국의 종교에 관한 이슈로 고발되었기에, 로마 총독이 판단할 사안이 아니었다.[20]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달랐다. 로마 시민권자도 아니었고, 반역죄로 고소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더라도 반역죄의 경우는 총독이 사형을 언도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 로마인 예수에게 자기 변호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유 무죄의 판결은 오직 빌라도의 판단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빌라도는 반역죄가 성립되는 지의 여부만 살피면 되었다. 그것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한 다음 고소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했던 이유이다.[21]

빌라도의 재판이 적법했는지의 여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클라크(Allen Clark)와 같은 학자는 빌라도의 행동이 불법적이었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빌라도에 의한 재판은 불법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역에 대한 새로운 범죄로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그것은 하나의 호소였다. 재판의 시작에서는 규정성과 엄숙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헤롯으로부터 다시 왔을 때 빌라도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군중들의 말을 들었다-여기서부터 어떤 질서나 규칙성도 없었다”.[22]

클라크의 견해에 대한 반론은 빌라도의 재판이 적법했다는 것이다. 첫째, 그는 유대의 통치자였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의 재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재판을 해야 했다. 대제사장들의 행위를 고소가 아닌 호소로 보는 것도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둘째, 반역죄에 대한 재판이었음에도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것은 무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23]

그에게는 징벌권(coercitio)이 있었지만, 관할권(jurisdiction)을 핑계로 행사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총독이 피고를 출신지로 돌려보내는 것도 정당한 재판 행위에 속했다. 그러나 빌라도가 재판관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엄중한 재판관이 아니라 타협적인 중재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 번 재판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자, 재판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III 빌라도 재판의 절차

요한복음에는 빌라도의 재판이 관저 밖으로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면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묘사했다.

# 1. 빌라도가 밖으로 나오다.[24]

대제사장들과 무리가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와서 고소했다. 빌라도가 무슨 일로 고발하는지 묻자 그들은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빌라도는 죄목이 없는 고발 건으로 재판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며, “너희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거부했다. 그제야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 통치자의 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정도의 죄-반역죄로 고발 당했음을 알아챈다.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은 예수가 반역죄로 고소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25] 여기서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 법정에서 다룬 신성모독이 아니라, 로마 법정에서 다루어질 반역으로 바뀌었다.

# 2. 빌라도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심문하다.[26]

먼저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에 해당하는 구체적 행동을 했는지 물었다. 예수는 자신의 왕권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27]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반대 심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는 자신이 왕이지만, 진리에 속한 자들이 자신을 따른다고 대답했다. 빌라도는 반역죄 성립의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단어 ‘진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물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가 통치 행위-화폐 주조, 세금 징수, 군사 행동, 영토 확보 등의 구체적 반역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때 군중들이 빌라도에게 유월절 사면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28]

# 3.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 중재를 시도하다.[29]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결과 무죄로 판명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무죄 선언(absolve/videtur nonfecisse)이었다면, 즉시로 예수를 방면하거나 재판을 무효화하고 추가 조사를 실시할 수도 있었다. 이 절차를 가리키는 말은 재판 연기(non liquet/ amplius est cognoscendum)이었다.[30] 하지만 그는 판결을 내리는 대신 협상을 시도했다. 유월절 사면을 실시하겠다며, 바라바와 예수 중 하나를 고소인들이 선택하게 했다.

로마의 엄중한 법정에서 예수의 운명은 재판관이 아닌 고소인들의 결정에 맡겨지게 되었다. 예수를 죽이라며 끌고 온 고소인들이 사면 대상자로 예수를 선택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바라바를 선택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은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며 소리쳤다고 한다.[31]

# 4. 빌라도가 안으로 들어가다.[32]

빌라도는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채찍질하고 희롱하게 한 것이다. 군인들은 예수를 채찍질한 다음, 가시 면류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붉은 색 옷을 입히고 오른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유대인의 왕을 환영하라”고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 5. 빌라도가 예수를 데리고 나오다.[33]

빌라도는 피투성이가 된 채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쓴 예수를 고소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했다. 고소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바라바를 사면하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요청을 빌라도가 거절할 구실이 없어졌다.

빌라도는 다시 한 번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한 발 물러섰다. 이 대목에서 빌라도는 재판권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옹색한 변명까지 했다. 군중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집요하게 소리쳤다.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하는 죄는 유대인에게 신성모독이고, 로마인에게는 반역이었다. 왜냐하면 황제에게만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34] 군중들은 티베리우스의 신성을 찬양하는 빌라도가 예수를 반역자로 정죄하도록 몰고 갔다. 빌라도는 시간이 흐를 수록 두려움에 잡혔다.

# 6. 빌라도가 안으로 들어가 다시 예수를 심문하다.[35]

빌라도는 예수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물었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대부분의 자만한 통치자가 그렇듯, 빌라도도 허세를 부렸다. “내가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 예수는 그 권한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말하고,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대답했다.[36]

군중들은 바깥에서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소리쳤다.[37] 이 문장을 하나로 만들면 “예수를 방면하면 황제에게 반역하는 자의 친구이지, 황제의 친구가 아닙니다”가 된다. 빌라도를 겁박하기에 충분히 위협적인 구호였다.

# 7. 빌라도가 예수를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앉히다.[38]

빌라도의 기행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예수를 자신의 재판석에 앉힌 것이다.[39] 그리고는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외쳤다. 군중들은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는 구호를 외쳤다.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물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제사장들이 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IV. 빌라도 재판의 모순

빌라도 재판의 최대 모순은 판결을 내리지 않고 형이 집행되게 만든 것이다. 그는 판결문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 4 복음서 어디에도 빌라도가 판결문을 공표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저 “넘겨주었다”라고 썼을 뿐이다.[40] 재판은 법적 절차이며, 판결 없는 재판은 용어상 모순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본다. {비겁함 때문이든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든 빌라도는 판결 내리는 일을 회피했고, 따라서 판결 없는 재판에 뒤이은 십자가 처형은, 비록 반역죄에 대한 법[내란방지법]에 따른 것이라고는 해도, 법학적인 견지에서 형벌이라고 할 수 없다.

로마 재판법에서 콘뎀나시오(condemnation)라는 용어는 “죄를 지은 것으로 보이면, 피고는 [형벌을] 선고 받는다.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보이면, 피고는 석방된다(si paret, condemnato; si non paret, absolvito)”라는 규정에 등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재판관에게는 재판 결과에 입각하여 피고인에게 [형벌을] 선고하거나 그를 석방할 재량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용어는 “유죄 형벌 선고(condanna penale)”를 뜻하는 담나시오(damnatio)라는 용어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 재판의 경우 “유죄인지 무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nulla appare)]”. 그럼에도 판결 없는 재판이 끝난 후에는 선고 없는 사형이 집행되었다}.[41]

빌라도 재판의 모순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재판 건을 하나로 합쳤다는데 있다. 바라바는 폭동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 인물이었다.[42] 예수에 대한 재판과 바라바에 대한 재판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군중들이 예수의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유월절 사면 청원을 한 것이다. 그러자 빌라도는 두 개의 재판 건에 대해 유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한 건의 사면 방식으로 처리하기를 원했다.

먼저 예수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했지만, 바라바에 대한 재판까지 진행한 다음 별도의 사면 건을 처리하는 것이 성가시게 보였을 것이다. 어차피 한 명은 방면해야 했으므로, 재판을 중단하고 사면 절차로 건너뛰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었다. 만약 예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 바라바는 특별 사면으로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내란 죄로 기소된 죄수가 모두 풀려나게 된다. 뼛속까지 군인이었던 빌라도에게 그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유월절에는 내란을 일으킨 죄수를 성문 근처 십자가에 매달아 본보기를 삼을 필요가 있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었다. 로마에 대해 항쟁하기 원하는 집단에게는 군중을 선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다급해진 빌라도는 한 명이라도 십자가에 매달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무죄 판결을 잠시 멈추고, 유월절 사면 절차를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쩌면 빌라도는 바라바 대신 예수를 놓아주기 원했을 지도 모른다. 빌라도의 눈에 예수는 철학자이고, 바라바는 내란을 선동한 살인범이었기 때문이다. 폭동 예방을 위한 전시 효과로도 예수보다 바라바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가 재판을 중단하고 협상 테이블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상황은 예기치 못한 국면으로 치달았다. 무죄라고 선언했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고, 내란 선동자의 본보기를 삼으려 했던 바라바는 놓아주게 되었다.

마침내 빌라도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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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주]

[1]이름과 달리 실제로 사도들이 작성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3~4세기에 세례 신자 교육용으로 만들었던 것이 5세기 이후 예배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굳이 사도신경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아마도 사도들이 물려준 정통 신앙 고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2]“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행 3:13).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행 13:28).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요 19:12).

[3] 황제 직속이었던 유대 땅의 통치자가 되는 것은, 어지간한 재력과 황제와의 인맥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집안은 황제 집안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은 빌라도가 당시 황실 근위대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자누스(?-기원후 31년)의 추천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타키투스가 “세자누스(Lucius Aelius Sejanus)와 가까운 사람은 가이사의 친구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라고 한 말에 근거한 추측이다. 하지만 세자누스는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의 투쟁에서 밀리면서, 기원후 31년에 수많은 지인들이 함께 처형되었다. 만약 빌라도가 세자누스의 사람이었다면, 기원후 36년까지 유대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속주의 행정장관 임기는 3년 정도에 불과했다.

[4]1961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은 고대 가이사랴 마리티마 극장 주변에서 ‘신성한 티베리우스를 위해 폰티우스 필라투스 유대의 사령관이’라고 해독되는 비문을 발견했다.

[5] 기원후 30년에 주조된 동전의 한 면에는 헬라어로 ‘티베리우스 황제의(것)’이라고 씌어 있고, 다른 면에는 제의용 기구와 함께 티베리우스 재위 17년을 의미하는 ‘LIZ’가 새겨져 있다.

[6] 유병성, 성경과 이스라엘 제 3호(2019년 3월), 성경과 이스라엘 연구소, 60-64쪽.

[7] J. Macartney Wilson,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s. v. “Pilate, Pontius”, p. 23, 96(임덕규 지음, 로마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CLC, 2013년, 98-99쪽에서 재인용).

[8] 그의 권한은 군사, 재정, 사법적 영역에 모두 미쳤다. 그는 시리아 군단처럼 정규군이 아니라 일종의 경찰과 같은 보조 병력을 통솔했다. 그의 병력은 500명 단위의 보병 5개 부대와 기병 1개 부대 정도였으며, 대부분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안토니우스 요새에는 성전 치안을 보조하는 정도의 소수 병력만 주둔시켰다.

[9]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막 7:11). 고르반(코르반)의 문자적 의미는 ‘예물’ 즉, 하나님께 드리는 물건이다.

[10] 요세푸스 저, 김 지찬 역, 유대 전쟁사, 생명의 말씀사, 1987, 제 2권 9장, 205-06 쪽.

[11]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눅 13:1).

[12] 요세푸스 저, 김 지찬 역, 유대 고대사 제 18권 4장, 511-12쪽.

[13] 기원후 21년 원로원은 총독들이 아내를 데리고 임지에 갈 수 있도록 결정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다.

[14] 마 27:19. 빌라도의 아내 이야기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공관복음의 기록 순서를 따라 갈수록 노골적이 되어가는 반 유대주의 성향과 관계 있어 보인다.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를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유대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15]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프로쿨라를 성인으로, 에티오피아 교회와 콥트 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녀를 모두 성인으로 모신다. 그녀의 개종은 교부 오리겐이 주장하기 시작했다.

[16] 이 책의 원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이다. 원문은 2피트x 4피트 크기의 50권 분량으로 되어 있으며, 이스탄불의 소피아 사원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 판은 내용의 극히 일부분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은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관해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보고서이며, 실존 역사가 발레루스 파테르쿠루스가 주석을 붙인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문서의 진정성을 믿는 사람들은 1세기에 씌어졌다고 주장하지만, 발레루스가 예수를 직접 만나본 내용이 자세히 나오는 등 전형적 위작의 형태이다.

[17] 조르조 아감벤, 빌라도와 예수, 꾸리에, 2015년, 19-20쪽.

[18] Francis Lyall, “Roman Law in the Writings of Paul-Aliens and Citizens,” The Evangelical Quarterly 48(January-March 1976) p 12; 임 덕규, 앞의 책, 106쪽에서 재인용.

[19]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행 25:12). 바울의 항소권이 인정되어, 총독 앞에서의 1심 재판 자체가 생략되었다.

[20] 행 25:18-19.

[21] 요 18:38; 19:6.

[22] Allen Clark, “The Court Trials of Jesus: Illegal,” Faith for the Family , March/April, 1976, p 15; 임 덕규, 앞의 책, 114-15쪽에서 재인용.

[23]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눅 23:4,5,7).

[24] 요 18:28-32.

[25] 눅 23:2.

[26] 요 18:33-38.

[27]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나라’로 번역했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kingdom’으로 번역한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권’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고대 세계에서 ‘왕권’이 곧 ‘나라’이었기 때문이다. 즉, 나라의 중심은 백성이 아니라 왕이었다.

[28]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막 15:6-8).

[29] 요 18:38-40.

[30]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39쪽.

[31] 마 27:24.

[32] 요 19:1-3.

[33] 요 19:4-8.

[34] 가이사랴에서 발견된 빌라도 비문에 새겨진 글이나, 빌라도의 동전에 새겨진 문양들은 모두 황제의 신성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마가복음 첫 문장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로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행위라고 할 수 있다.

[35] 요 19:9-12.

[36]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수난을 묘사할 때, 그리고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의 생애를 묘사할 때 대표적으로 쓰는 단어는 ‘넘겨주다(파라디도미)’이다. 이를테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넘겨주었고(요 18:5), 대제사장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요 18:30), 빌라도는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를 넘겨주었다(요 19:16).

[37]요 19:12.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서 ‘가이사의 충신’으로 번역한 헬라어 ‘필로스 투 카이사로스’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Caisar’s friend’로 번역했다. ‘가이사의 친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빌라도는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 말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근위 대장 세자누스를 빗대어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친구는 상황이 바뀔 때 가이사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38] 요 19:13-16.

[39] 요 19:13.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을 따라 빌라도가 ‘앉아 있더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헬라어 동사 ‘에카띠센’을 타동사로 해석하여 예수를 ‘앉혔다’로 번역이 가능하다.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왕으로 조롱하게 했던 게임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베드로 복음서 3장 7절에도 “유대인들은 그에게 홍포를 걸치게 하고 재판석에 앉힌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정의롭게 심판하소서”.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지 않았을 가능성은 그가 예수를 넘겨주었다는 진술과도 어울린다(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67-68쪽).

[40] 마 27:26; 막 15:15; 눅 23:25; 요 19:16.

[41] 조르조 아감벤, 앞의 책, 90-91쪽.

[42] 바라바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이다. 어쩌면 바라바는 본명이 아니라 내란을 선동하는 그룹 안에서 통하는 별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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