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1)
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1)
  •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의학박사/미인피부과원장)
  • 승인 2018.12.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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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진영의 천년왕국론 논쟁과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

(Millennial Debate among Evangelical Groups and Notable Changes in Dispensational Eschatology)

 

Ⅰ. 서론

Ⅱ. 본론

  1. 역사적 전천년설의 주장과 쟁점

  2.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변천과정과 쟁점

  3. 후천년설의 주장과 쟁점

  4. 무천년설의 주장과 쟁점

  5. 천년왕국론의 역사적 흐름

  6. 천년왕국론의 근본적인 쟁점과 실천적 함의 

Ⅲ. 결론

[참고문헌]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이수근 목사(아신대신대원, 조식신학 Ph.D 과정)

Ⅰ. 서 론

오늘날 복음주의1) 진영의 종말론은 일반적으로 ‘이미와 아직’, 또는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 간의 긴장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이미’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상태를 말하고 ‘아직’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최종 상태를 말한다.2) 그리고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육체적 부활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 이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통치하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벌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데 대해서 별 이견이 없다.3)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언급된 천년 동안의 기간, 즉 소위 천년왕국(millennium)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교회사 전체에 걸쳐 여러 이해가 있어왔고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논쟁적인 종말론 주제로 인식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문자적인 천년왕국 전(前)일지, 후일지, 혹은 천년을 상징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어왔고 이들을 각각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로 부르고 있다. 대체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첫 수세기 동안은 전천년설,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오랫동안은 무천년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로는 후천년설이 힘을 얻었다고 보고 있다.4) 전천년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두 가지 형태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스펙트럼으로 보기에는 서로 간의 간극이 상당히 크며 교단이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소통의 단절마저 존재한다. 또한 주로 기독론적인 면에서 이단이 많이 발생하였던 초기 기독교사회에 비해 오늘날은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건전하지 못한 종말론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5) 문제가 많은 종말론이 그동안 일으킨 사회적, 교회적 파장은 최근에 교회와 신학계에서 종말론에 대한 가르침과 논의가 상당히 위축되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약화된 종말론은 결국 더 많은 불건전한 종말론의 발호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우선 각 천년왕국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교리적으로 분석비교하고 논쟁점들을 정리한 뒤 교회사 속에서 이 주장들의 흐름과 이들이 가지는 실천적 함의와 쟁점들을 요약하는 것을 연구의 주목적으로 하였다. 또한 본 소논문에서는 각 천년왕국론 진영들에서 오랫동안 눈에 띄는 교리적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극단을 피해 합리적인 방향으로 종말론의 변천을 겪고 있는 세대주의 신학 동향에 대해서도 함께 기술할 예정이다. 아울러 결론 부분에서는 이들을 토대로 21세기 개혁주의적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장 수용성이 높은 이론이 무엇일지에 대한 본 연구자의 고민을 담았다.

 

Ⅱ. 본 론

1.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의 주장과 쟁점

1.1.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전천년주의자들(계 20:1-6)6)은 해석할 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첫째는 요한계시록에 상징적 표현들이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짧은 본문에 ‘천년’이라는 표현이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는 것이다.7) 이를 단순한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천년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을 받아들인다.8) 둘째는 4-5절에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에 분명한 시간적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로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이고 둘째 부활은 모든 불신자들의 부활로 이는 영원한 심판을 받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시간적으로 구분된 두 번의 부활사건은 전천년설에서만 주장된다.9)

두 번의 부활사건에 대한 G. E. 래드(1911-1982)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19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20장은 재림 뒤의 사건을 묘사한다. 여기서 20장 4-5절의 ‘ezhsan’(그들이 살았다 or 살아났다)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을 말한다. 즉 4절은 신자들의 부활, 5절은 불신자들의 부활을 말한다.10) 고전 15:23-24의 주석을 통해서는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에서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음 열매인 성도들의 부활 사이에 상당한 시간 간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성도들의 부활과 그 다음에 있을 마지막(종말) 사이에도 확인되지 않은 상당한 시간 간격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래드는 그 기간이 바로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했다.11)

종말에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지 않고 굳이 지상에서의 황금시대를 상정하는 근거는 성경에 많이 나온다. 구약의 여러 본문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자들과 함께 지상의 모든 왕들과 나라들을 다스릴 것을 예언하고 있다. 민족끼리 다시는 전쟁이 없고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시대가 분명히 올 것이다(사 2:2-4; 11:6-8; 겔 36-47장; 단 7:14,18; 미 4:1-8). 신약성경에도 지상에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시사하는 본문들이 있다(마 5:5; 6:10; 히 3:7-4:13).

그리스도의 재림과 대환난12) 시기의 전후관계에 대해서는 전천년주의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전환난론자(pre-tribulationist)들은 그리스도의 2단계 재림을 주장한다. 즉 환난 전에 교회를 휴거(rapture)시키기 위해 공중재림하신 뒤, 환난이 끝나면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첫 단계에선 세상에서 성도들은 갑자기 모두 사라지게 되지만 정작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고, 두 번째 단계에선 지상의 모든 사람이 영광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그 근거는 첫째, 살아있던 성도들이 휴거되어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며(살전 4:16-17) 둘째, 교회와 성도들을 장차 노하심에서 건져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살전 1:10; 5:9; 계 3:10) 셋째, 갑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고하는 본문들은 환난전 재림에 적합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후환난론자(post-tribulationist)들은 그리스도가 환난 끝에 단번에 재림하신다고 믿는다. 그 근거는 첫째, 성도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본문이 많고(행 14:22; 롬 5:3; 살전 3:3) 환난을 당해도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담대해야 하며(요 16:33)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해주신다(마 24:21-22)고 약속하셨으며 둘째, “공중에서 주를 영접(살전 4:17)”하는 것은 성문 밖으로 나가서 개선장군을 환호성과 함께 맞이하는 고대인들의 관습이 반영된 본문인데 이런 (공중)재림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면 우스운 일이므로 이 본문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한 사람은 남고 한 사람은 남는다는 말씀(마 24:40)은 갑작스런 휴거를 말함이지 비밀스런 휴거를 말함이 아니라는 것이다.13)

그리스도의 지상강림 뒤 적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고 그 전후로 해서 지상에 살아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구원받는다. 이들의 회심은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별개의 집단을 구성하지는 않으며 구속받은 이방인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된다. 지상의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사람들은 부활한 성도

들과 재림시 살아있던 성도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 시대에 여전히 존재하는 불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철장으로 제재하고 다스리신다. 천년왕국은 죄와 사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최종 상태와는 다르다. 하지만 악은 크게 억제되며 의가 크게 편만해진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큰 평화와 번영의 시대이다. 천년이 끝날 무렵 사탄의 무리가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성도 진영을 공격하겠지만 그들은 패배하고 사탄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불신자들의 부활이 있게 된다. 부활한 모든 신자와 불신자는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여부에 따라 영생과 불못으로 운명이 갈리게 된다. 심판 뒤에는 최종 상태가 시작된다.14)

 

1.2. 주요 쟁점

무천년주의자인 후크마는 그의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세대주의 전천년설15)에 대해선 격렬하고 광범위한 반박을 하면서도 역사적 전천년설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반박하는 입장이다. 후크마는 래드의 주장에 담긴 긍정적인 면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래드가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두 그룹이 아니라 오직 하나이고 둘째, 하나님 나라에는 현재적, 미래적 의미가 있으며 셋째, 현재 교회가 종말론적인 복을 누리고 있고 넷째, 시대의 표적은 초림 때부터 있어왔지만 재림을 앞두고 강화될 것이며 다섯째,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단계가 아닌 단일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내용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면서도 세대주의에 휩쓸리지 않은 점을 높이 산 것이다.16)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에는 다음과 같은 쟁점사항이 있다.

첫째, 이들은 단지 성경의 한 부분에만, 그것도 묵시록에 나오는 ‘천년’이라는 문구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을 비판받는다. 하지만 전천년주의자들은 오히려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를 반대한다. 사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천년’이 요한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6번의 횟수는 ‘삼위일체’가 성경에 언급되는 횟수(0번)보다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7)

둘째, ‘재림후 천년왕국’이라는 구도와 ‘ezhsan’을 문자적인 육체의 부활로 보는 시각이 (계 20:1-6)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본문을 죽은 자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무천년설적인 해석이 5세기 이후로 오늘날까지 꾸준히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며18), ‘살아서(ezhsan)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이들’을 부활한 성도로 볼 경우 그리스도의 재림 시 아직 살아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천년왕국에서 어떤 상황에 있을지 모호하게 넘어가는 단점이 있다.19)

셋째, 두 번의 독립된 부활 사건의 근거로 제시된 (고전 15:23-24)은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에 대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바울의 다른 서신 가운데에도 종말에 앞서는 지상에서의 과도기간 같은 것이 나오는 본문은 없다.20)

넷째,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와 부활한 성도들이 죄와 사망이 여전히 존재하는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어떻게 나중 형편이 더 나빠질 수 있는가. 이는 동시에 “중간상태”의 신학적 정당성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21)

다섯째,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신약의 종말론에 어긋난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어디에도 현세와 내세 사이에 제3의 시대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요한계시록 20장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면서 ‘악이 여전히 존재하는 모호한 제3시대’를 상정하기보다는 이 난해한 본문을 성경의 여러 부분에 나오는 분명한 가르침을 토대로 조화롭게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22)

 

2.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의 변천과정과 쟁점

2.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이 복음주의권에서 소수 의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자주의에 치중하고 하나님의 두 백성 신학을 주장한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세대주의 신학은 시한부 종말론 등의 이단적인 종말론으로 빠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개 초기 이론들에 대한 것이며, 세대주의 신학이 20세기 중후반에 많은 변천을 거쳐 지금은 상당히 합리적인 지점까지 와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대주의 신학은 19세기초 영국 성공회 목회자로 출발했다가 후에 형제운동(Brethren Movement)을 주도했던 존 넬슨 다비(1800~1882)가 창시한 것으로, 그 두 가지 기본원리는 첫째, 예언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고 둘째, 이스라엘과 교회는 근본적이고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주의를 대표하는 주장들이 실려 있는 1967년판 <새 스코필드 관주성경(New Scofield Reference Bible)>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7 세대(시대, dispensation)로 나뉜다. 즉 순수(innocence, 창조~타락), 양심(conscience, 타락~노아), 인간통치(government, 노아~아브라함), 언약(promise, 아브라함~모세), 율법(law, 모세~그리스도), 교회(church, 그리스도~교회휴거(대환난)), 왕국(kingdom, 환난후 지상재림~심판) 시대이다.

여기서 ‘시대’는 ‘인간이 어떤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의 계시에 대한 순종과 관련해서 검증받는 일정한 기간’으로 정의된다. 하나님은 각 시대별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지만 그럼에도 모든 시대를 통틀어 오직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23) 비록 시대의 구분 그 자체가 신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각 시대에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4)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미래의 어느 때에 하나님이 옛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하는 지상의 한 왕국이 건설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고 보며 여기에는 아브라함, 다윗, 예레미야 31장 31-34절, 시편과 선지서의 많은 본문들이 포함된다. 세대주의자들은 이 예언들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 성취될 것이라고 예상한다.25) 특히 이들의 주장에서 주목할 점은, 구약의 예언들이 다윗 왕국에 대한 것이지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표 속에서 하나의 ‘막간’에 해당하는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하신 프로그램의 중간에 ‘삽입된(끼어든)’ 것으로 본다.26)

 

2.2. 세대주의 종말론의 변천과정

2.2.1. 고전적(classical 또는 classic) 세대주의27)

그림 1. 세대주의의 역사 (http://www.wikiwand.com/en/Dispensationalism에서 인용)
▲그림 1. 세대주의의 역사 (http://www.wikiwand.com/en/Dispensationalism에서 인용)

 

J. N. 다비, C. I. 스코필드, 스코필드 관주성경(1909),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달라스신학교 설립자), 윌리엄 켈리, C. H. 매킨토시, H. A. 아이언사이드 그리고 20c 후반엔 스탠포드(Miles Stanford) 등이 주장했던 신학이다. 스코필드 관주성경이 그 중심에 있으므로 스코필드주의(Scofieldism)라고도 부른다. 사도행전 2장을 교회의 시작으로 여기므로 세례(침례)와 성찬을 모두 행하며 Pauline Dispensationalism이라고도 부른다.28) 중요한 특징으로는 첫째, “하나님의 두 백성(two peoples of God)” 즉 천상의 백성(교회)과 지상백성(이스라엘)을 명백히 구별하며 둘째, 교회를 구속사에 있어서 삽입구(parenthesis, 괄호, 짬, 막간극 또는 intercalation)로 이해하고 셋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천국,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Heaven)를 분명하게 분리해서 전자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영적 통치, 후자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지상통치를 가리킨다고 본다.29)

결국 고전적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은 새 땅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교회는 새 하늘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철저한 이원론적 시각을 특징으로 한다. 다윗왕조의 회복과 그로 말미암은 신정왕국의 등장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국의 의미로 본 것으로 이는 인간의 영원한 최종상태를 이중 구조적으로 이해한 것이다.30)

 

2.2.2. 수정(revised) 세대주의 또는 본질적(essentialist) 세대주의

오늘날 세대주의의 주류를 이루는 신학이며 여기에는 개정판 스코필드 관주성경(Revised Scofield Reference Bible, 1967), 찰스 라이리(Charles Ryrie), 존 왈부드(John F. Walvoord),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 맥클레인(Alva J. McClain) 등이 속한다. 중요한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두 백성” 개념을 사실상 포기해서 천상백성과 지상백성 사이의 영원한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교회가 누리게 될 영생이 그 질과 영역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본다. 둘째,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의 축복을 교회도 함께 누린다고 보면서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셋째, 고전적 세대주의의 잦은 영해를 지양하면서 더 일관된 문자주의적 해석을 시도했다. 문자주의가 세대주의의 본질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구분을 상당히 포기했고 심지어 이들이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31) 다섯째,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인정하는 추세이며 맥클레인 등은 여전히 이것을 전적인 미래의 일로 생각한다.32)

비록 이들이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 심지어 동의어로 보기도 한다 - 이스라엘과 교회가 영원한 최종상태에서는 결국 구분되지 않고 연합된다고 보지만, 여전히 구약 예언을 이 땅에서의 다윗왕권의 회복으로 보며 교회의 환난전 휴거설을 주장하는 등 고전적 세대주의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33)

 

2.2.3. 점진적(진보적, progressive) 세대주의

1980-1990년대에 언약신학이나 역사적 전천년주의에 보다 가까워진 형태의 새로운 세대주의가 생겨났고 이들은 전통적 세대주의자들로부터 비세대주의(non-dispensationalism)라는 비판도 듣는다. 여기에는 사우스웨스턴의 크레이그 블레이싱(Craig Blaising), 달라스신학교의 대럴 박(Darrell Bock), 탈봇신학대학원의 소시(Robert Saucy)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특징은 첫째, 각 세대 간의 구별은 인정하면서도 그들 간의 점진적인 연속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세대의 갯수도 7개가 아니라 3~4개 정도로 나누는데, 모든 세대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 실현되는 영원한 왕국을 향해 점진(progress)한다고 본다. 따라서 현 교회(은혜) 시대는 이전과 이후 시대의 key(또는 vital) link 역할을 한다. 둘째, 구약 예언의 점진적 성취(fulfillment)를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언약들이 현 세대에 성취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며, 메시아 왕국은 그리스도의 승천 때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론 그 정치적-사회적 통치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현재 이미 영적통치 가운데 있다. 즉 ‘이미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적 구도를 따른다. 셋째, 구원론적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은 하나 서로 완전히 평행선을 긋는다고 보지 않으며, 교회를 삽입구 즉 하나님의 구속계획에 원래 없었던 또는 이차적인 계획으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34) 넷째, 천년왕국과 영원한 왕국 사이에 더 큰 연속성을 부여한다. 블레이싱에 따르면 천년왕국과 영원한 왕국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들을 종류의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천년왕국을 과도기로 보는 것이다.35)

 

2.3. 천년왕국과 관련된 종말의 사건들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단계로 일어난다고 이해한다. 첫 단계는 그리스도의 공중재림인데 이 때 구약시대 성도들을 제외한 죽은 성도들의 부활, 살아있던 이방인과 유대인 성도들의 영화 그리고 이들의 휴거가 발생한다.36) 이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 7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벌인다.37)

이 7년 동안 다음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단 9:27)의 환난이 시작되는데 그 후반기가 소위 ‘대환난’이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 지상 거민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38)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며, 이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들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계 7:9). 하지만 땅의 왕들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군대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기 위해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킨다.

7년이 끝나면 그리스도가 교회와 함께 영광중에 지상에 재림하셔서 원수를 멸하시고 전쟁을 끝내신다. 살아있던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께 돌아와 구원을 받아 구약-신약의 예언이 성취된다. 마귀는 결박되고 무저갱에 던져져 천년 동안 인봉된다. 7년 환난 기간 중에 죽은 성도들은 이때 부활하는데 이들은 곧 시작되는 천년왕국에는 들어가지 않으며 하늘에서 휴거된 교회를 구성하는 부활/영화된 성도들과 합류하게 된다. 곧이어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이방인심판(마 25:31-46)과 유대인심판(겔 20:33-38)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양과 염소가 구분되어 각각 천년왕국에 참여하거나 영원한 불 속으로 던져진다.39)

이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역사적 전천년설과는 달리 세대주의 전천년설에선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만 지상에 남아있다. 이들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고 대다수는 살다가 죽을 것이다.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번영의 시대가 이루어진다. 예배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제사는 속죄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기념제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부활한 성도들은 천년왕국 기간 동안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

지상에는 많은 자녀들이 새로 태어나는데 이들 대다수는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반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천년이 끝날 때 사탄이 풀려나서 이들을 규합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킬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궤멸되고 원수들은 멸망당하고 사탄은 불못에 던지운다. 천년이 끝나기 전에 이 기간 중 죽었던 성도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고 천년이 끝나면 불신자들이 모두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지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그 다음이 최종상태이다. 부활한 성도들이 거하던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새 땅’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여기서도 구속받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는 영원한 구분이 있다.40)

 

2.4. 주요 쟁점

후크마가 그의 종말론 책의 한 장(章)을 온전히 세대주의 비평에 할애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41) 그 내용들 중 중요한 쟁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에 대해 하나님이 근본적이고 영속적인 다른 목표를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이 교회를 말할 때 육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 이방인의 미래와 믿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분리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용어가 신약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신약 본문이 하나 이상 있고(갈 6:15-16)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사용된 어휘들인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을 사용해서 이방인들이 중심이었던 신약교회를 지칭하였으며(벧전 2:9) “아브라함의 자손”도 기독교인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갈 3:28-29) 이는 시온과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히 12:22-24; 계 21:2).42)

둘째, 세대주의에선 구약이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고 말한다(사 65:17-25; 사 11:6-10; 겔 40-48장; 사 2:1-4). 하지만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그 본문들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최종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43)

셋째, 천년왕국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간다고 보는 세대주의의 시각은 주석학적 오류에 기인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이 자기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예언(사 11:11-16; 렘 23:3,7-8)은 BC 6세기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귀환할 때 이미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많은 구약본문들은 이처럼 문자적 의미에서, 신약교회의 기적적인 탄생과 성장에 대한 비유적 의미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최종적인 “새 땅”에서 달성될 원형적 의미에서 그 성취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44)

넷째, 세대주의가 하나님 나라의 지연을 가르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예수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주님을 거부해서 하나님 나라를 연기하셨다는 이론이 모순된 것은, 이미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성경에 분명히 나오고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마 12:28)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지상에서 보좌에 오르려고 노력하셨던 분도 아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8:36).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받아들였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까 하는 의문을 일으킬 뿐이다.45)

다섯째, 세대주의자들은 각종 사회현상들에 대해 지나치게 요한계시록의 구체적인 종말사건들과 일치시키려는 “일간신문 접근방법(newspaper approach)”을 취하고 있다. 이는 요한계시록을 일종의 예언목록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마겟돈 전쟁으로 오판했던 여러 전쟁들은 더 이상 세계전쟁으로 확산되지 않고 끝났으며 이에 대해 세대주의자들은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46)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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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복음주의의 정의 문제는 ‘깨기 어려운 호두’에 비교될 정도로 복잡하다. 본 소논문에서는 한상화 교수가 주장한 당위적 또는 신학적 의미의 정의에 입각해서 개혁주의적 입장과 경건주의적 입장을 모두 포괄하면서 성경의 증거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수호하고 천명하는 기독교인들을 복음주의 진영으로 보았다. 한상화, 「포스트모던 사상과 복음주의 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231-258 

2)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종말론」,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7 

3)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가 모두 1세기에 성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들을 실현론자(preterist)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육체 재림과 죽은 자들의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고 성경의 묵시적 이미지들을 너무 과장하고 확대해석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Gregory A. Boyd, Paul R. Eddy, 「복음주의 신학 논쟁」, 박찬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580-584

4)  Ibid., 478-479

5) 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7권 (2000): 158

6)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1-6)

7) “천년”이라는 말은 5절의 괄호 친 본문에 한 번 더 나오고, 7절에도 천년이 끝난 뒤에 사탄이 풀려난다는 말씀 속에 한 번 더 언급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0장에는 모두 6번의 “천년”이 언급된다고 볼 수 있다. 

8) 그럼에도 대표적인 전천년주의자인 G. E. 래드는 ‘천년’이 엄격하게 1,000년은 아닐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G. E. Ladd,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1972), 262-263.

9) Gregory A. Boyd, 480-481. 

10) G. E. Ladd, 35-38.

11) Ibid., 38-39. 

12) 환난과 환란의 일반적인 용법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환난(患難)'은 [환ː난]으로 발음하며, 근심과 재난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환란(患亂)'은 [활ː란]으로 발음하며, 근심과 재앙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http://krdic.naver.com/rescript_detail.nhn?seq=2355, 2015년 10월 7일 검색. 개역개정성경은 tribulation, trouble, suffering, distress, affliction 등에 대해 ‘환난’으로만 번역하고 있으며 환란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13) Gregory A. Boyd, 584-589.

14) Anthony A. Hoekema, 255-256. 

15) 역사적 전천년설은 세대주의가 광범위하게 대중화되는 가운데 G. E. 래드를 비롯하여 20세기 중반에 자신들을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이며 고전적인 세대주의와 구별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Kenneth L. Gentry Jr. et al, 「천년왕국이란 무엇인가」, 박승민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266.

16) Ibid., 258.

17)  Gregory A. Boyd, 486-487.

18) 실제로 무천년설에선 ‘에제산’이 죽었던 영혼의 거듭남의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래드와 같은 전천년주의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육체가 아닌 영혼의 생명과 관련되어 사용된 적절한 예가 없다고 주장한다. 

19) Anthony A. Hoekema, 258-259.

20) Ibid., 259-260.

21) Ibid., 260-261.

22) Ibid., 261-262.

23) New Scofield Bible, 3 n3.

24)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목회와신학」 1995년 2월호.

25) E. Schuyler English, A Companion to 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72), 97.

26) John F. 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 (Findlay, Ohio: Dunham, 1958), 231.

27) 전통적(traditional) 세대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혼란스럽다. 김동완은 고전적 세대주의의 동의어로 사용했고, 김성주는 고전적 세대주의와 수정 세대주의를 한꺼번에 이르는 말로 사용했으며, Wikipedia에선 수정 세대주의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24권 (2011): 85; https://en.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theology #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28)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을 교회의 시작으로 여기는 Acts 2 dispensationalist들이다. 그런데 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중간 즉 사도행전 9장이나 13장으로 보면서 물세례를 거부하는 소위 Mid-Acts dispensationalist들을 Hyper-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교회의 시작을 바울로부터 기원을 따진다는 점에서 자신들을 Pauline 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더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사도행전 28장의 바울의 선언(행 28:28)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소위 Acts 28 dispensationalist들로 이런 신학을 Ultra-dispensationalism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물세례와 성찬을 모두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며 거부한다. 두 극단적인 세대주의는 4복음서는 물론 각각 사도행전의 중간 또는 마지막 장 이전에 쓰여진 바울 서신들도 모두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을 위해 쓰여진 성경으로 이해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 theology#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29)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0) 하지만 예수님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신 것이다.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3-84.

31) 하지만 수정 세대주의자인 찰스 라이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교회시대가 끝나야 임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철저히 미래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2. 

32)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3)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84-85. 

34) 수정 세대주의와 점진적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의 “회원 중첩(membership overlap)” 현상이 있음을 시인한다. 여기에는 바울, 베드로, 요한 등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포함된다. https://en. wikipedia.org/wiki/Dispensationalist_theology #Traditional_dispensationalism, 2018년 11월 24일 검색. 

35) 김동완, “세대주의 신학의 새로운 동향”

36) 세대주의자들은 대환난 시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준비시키신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세대주의자들은 ‘환난 전 휴거’ 즉 도둑처럼 임하는 갑작스런 재림을 믿는다. Dwight Pentecost, 「세대주의 종말론」, 임병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276.

37) 세대주의자들은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단 9:24-27) 중 69이레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 성취되었고 마지막 70번째 이레가 재림 때 성취될 것으로 예상한다. 

38) 계 7:3-8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의 인침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한다. 

39) Anthony A. Hoekema, 267-268.

40) Ibid., 268-270.

41) 후크마는 세대주의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류성, 그리스도의 문자적 재림 그리고 모든 시대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는 높은 평가를 보내고 있다. Ibid., 271.

42) Ibid., 274-281.

43) Ibid., 281-286.

44) Ibid., 286-294.

45) Ibid., 294-297.

46)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서울: 이레서원, 2015), 24-27.

 

[참고문헌]

Boyd, Gregory A., Eddy, Paul R. 「복음주의 신학 논쟁」. 박찬호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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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 「진리와 학문의 세계」 제24권 (2011). 77-96.

김추성. 「요한계시록 새롭게 읽기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서울: 이레서원, 2015.

서보명. “미국의 묵시록 8. 미국의 세대주의 신학”. 「제3시대」 제94권 (201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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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열. “기독교 종말론을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제안”.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17권 (2000). 15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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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직신학회. 「종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한상화. 「포스트모던 사상과 복음주의 신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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