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선교사 공청회_박재은교수 신학적 분석 및 제안
김용의선교사 공청회_박재은교수 신학적 분석 및 제안
  • 박재은 박사(총신대 조직신학 강사)
  • 승인 2018.07.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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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합신 총회 이단대책위원회 김용의 선교사 관련 공청회 발제문에 대한 신학적 분석 및 제안

박재은 박사(총신대학교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강사,)

​△좌로부터 박재은 교수(총신대신대원 조직신학 강사), 김성한 목사(합신 이대위 위원), 박형택 목사(합신이단연구소 소장)​
​△좌로부터 박재은 교수(총신대신대원 조직신학 강사), 김성한 목사(합신 이대위 위원), 박형택 목사(합신이단연구소 소장)​

1. 들어가는 말: 분석의 방향성

본 분석문은 성경과삶이야기 <울림>이라는 인터넷신문 매체의 의뢰를 받고 작성한 신학적 분석문이다. <울림> 측의 요청대로 지난 6월 7일 예장 합신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합신 이대위) 공청회 때 발표되었던 (김성한 목사, 박형택 목사) 발제문에 나타난 신학적 개념들을 분석하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분석문에서 사용한 자료는 다소 제한적임을 미리 밝혀둔다. 즉 본 분석문은 김용의 선교사(이하 김 선교사)의 저서나 강의, 설교 내용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공청회 때 발표된 발제문 두 부에 나타난 내용에 대한 신학적 분석 및 제안이라는 뜻이다.

본 분석문의 지향점은 어떤 특정인과 특정 단체의 이단성을 가리기 위함도 아니며, 발제문 두 부에 나타난 신학적 문제점들을 들추어내기 위함도 아니다. 그보다는 동봉 된 발제문 두 부에 나타난 신학적 쟁점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이 중대한 사안에 어떻게 접근해야 신학적으로 더 건전한 접근법이 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울림> 측에서 보내온 발제문 두 부는 합신 이대위의 김성한 목사(이하 김 목사)와 박형택 목사(이하 박 목사)가 공청회에서 발표한 발제문(녹취 내용 전문)이며 이 발제문들을 각각 따로 분석하기보다는 핵심 논점들을 중심으로 함께 분석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발제문은 두 부이지만 내용에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두 발제문 중 중복되는 내용에 대해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김 목사와 박 목사가 김 선교사와 관련 단체의 주장들 중에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안들을 우선적으로 발제문에 각각 기록했다고 가정할 때 중복된 부분은 두 발제자 모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라고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석의 순서는 <울림> 측의 요청대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성화론에 대한 문제이고, 두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의 회개 부분에 대한 문제이다. 이 두 가지 국면에서의 분석을 마친 후 본 논의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 비평과 신학적 비평을 정리하며 본 분석문을 마치도록 하겠다.

 

2. 발제문에 대한 신학적 분석

2.1. 성화론

2.1.1. 핵심 논쟁 지점

김성한 목사와 박형택 목사의 발제문에 따르면, 김용의 선교사는 소위 ‘완전주의’(perfectionism)형 성화론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어 있다. 사실 완전주의형 성화론은 완전히 새롭거나 독특한 성화론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미 19세기 중후반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나 애서 매헌(Asa Mahan, 1799-1889)을 통해 주창된 오벌린 완전주의(Oberlin perfectionism) 같은 사상이나 혹은 미국 제2차 대각성 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 이후의 각종 인간중심적 성결운동 등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다.1) 완전주의형 성화론의 핵심은 성화 속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책임에 큰 무게 중심을 두며, 성화를 향한 인간의 적극적인 역할과 책임을 통해 이 땅에서 완전한 형태의 성화를 이룩할 가능성을 강조한다.

박 목사의 발제문 중 “왜곡된 성화의 문제” 부분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며 김 선교사의 주장을 완전주의형 성화론으로 평가하고 있다. 큰 따옴표로 직접 인용한 부분이 김용의 선교사의 주장이고, 직접 인용 처리하지 않은 부분이 박형택 목사의 주장이다.

“주님의 거룩이 곧 나의 거룩이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었다 … 성화론에서 되어간다는 말을 조심하라”는 말이 강의 내용에 나온다. 문제가 되지 않는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완전함을 온전히 믿음으로 응답할 때, 거룩을 이룬다”(?) 거룩을 완전하게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만약 발제자의 평가대로 김 선교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신 완전함을 우리의 자발적인 헌신과 순종으로 우리가 실제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혹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완전함을 이 땅에서 믿음으로 온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김 선교사의 주장은 완전주의형 성화론에 가깝다.

하지만 만약 김 선교사가 소위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 개념이 아닌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 개념 속에서 이러한 진술을 했다면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결정적 성화 개념은 확정적, 즉각적, 단정적, 단회적, 초기적 성화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는 성화 개념인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분여 받아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지니게 되었다는 개념이다.2)

김 목사의 발제문에 의하면, 복음학교 측에서 보내온 반론서가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의 주석을 인용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복음학교 측에서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 개념을 염두 한 채 성화론을 전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일견 하게 된다.

그러나 김 선교사나 복음학교 측에서 결정적 성화 개념을 염두 했다하더라도 결정적 성화 개념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이해 없이 사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머레이의 결정적 성화 개념은 이 땅에서 점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인 점진적 성화 개념을 약화시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만약 성화의 결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성화론에서 되어간다는 말을 조심하라”라는 진술, 즉 점진적 성화 개념을 약화시키는 진술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결정적 성화 개념의 핵심 개념을 놓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만약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완전함”을 결정적 성화 개념으로 이해 했다하더라도 여전히 그 거룩을 “믿음으로 응답해 우리가 이룰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즉 결정적 성화 개념과 점진적 성화 개념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의 성화에 대한 주장은 어쩔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 불필요한 신학적 긴장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2.1.2. 평가

성화론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역할‧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 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성화를 점진적 성화(인간의 역할‧책임 강조)와 결정적 성화(하나님의 주권 강조)라는 두 가지 국면 하에서 균형의 틀을 유지하며 조망하길 즐겨했다. 성화의 다층적 국면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개념 정리가 없는 채 진술되는 내용들은 필연적으로 논리적 모순과 긴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사안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성화론 속에서 논의되는 기본 개념에 대한 신학적 정리가 우선시되어야 하며, 양측 모두 다 같은 용어와 개념의 틀 가운데서 비평 및 비판 혹은 이에 대한 응전의 물꼬를 터야 할 것이다.

 

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의 회개 부분

2.2.1. 핵심 논쟁 지점

김 목사와 박 목사의 발제문은 김 선교사와 관련 단체들이 강조하는 ‘공개적인 죄 자백’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사안을 다룸에 있어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발제자들뿐만 아니라 복음학교 측 역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사안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각 사람이 그의 죄들을 하나님께 사적으로 고백하며 그것들의 용서를 구해야 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죄들을 버림으로써 자비를 얻게 되듯이, 그의 형제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상한 자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그의 죄에 대한 사적 혹은 공적 고백과 통회로 그의 회개를 기꺼이 선언해야 하고, 그들은 그것에 근거하여 그의 화해하고 사랑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3)

발제문에 의하면, 복음학교 측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을 근거로 모든 죄를(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모든 음란한 죄들까지 포함하여)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반대로 발제자들은 모든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들을 지적하며 공개적인 죄 자백의 문제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김 목사가 제시하는 공개적 죄 자백의 문제점은 첫째, 자신의 은밀한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할 때 생길 수 있는 수치심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 있으며, 둘째, 공개적인 죄 고백을 통해 각종 구설수의 중심에 서거나 가족 관계 혹은 인간관계가 파괴될 수 있으며, 셋째, 죄를 고백하는 자는 공개적인 죄 고백을 함께 공유한 단체에 영적으로 평생 종속되게 된다는 점이다.

반면 복음학교 측이 공개적인 죄 고백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발제문들은 복음학교 측이 주장하는 바를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요약 진술한다. ‘나의 복음’을 통해 믿음의 실재를 경험한 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사라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선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개적인 죄 고백은 십자가 앞에 서는 시간일 뿐 아니라 복음을 통과하는 귀한 시간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2.2.2. 평가

공개적인 죄 고백을 강조하는 김 선교사 혹은 관련 단체 측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반론을 펴는 발제자 측 역시 이 사안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자체가 핵심적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의 제목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Of Repentance unto Life)이다.4) 즉 공개적인 죄 고백이냐 아니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의 핵심 사안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구원의 서정(the ordo salutis) 중 한 국면으로서 신자를 향한 성령 하나님의 값지고 위대한 구원 적용 사역이 바로 회개라는 주제의 핵심 관건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1절에 따르면 회개란 ‘복음적 은혜’(히 5:13-14, 롬 4:19-20, 마 6:30)이다. 즉 회개란 인간이 쥐어짜내서 하는 것도 아니요 누가 공개적으로 하라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회개란 새로운 본성의 씨앗이 우리에게 심겨지고(거듭남‧중생), 회심의 은혜를 누리게 된 자가 맺게 되는 너무나도 값진 복음적 열매이다.

동시에 이 사안을 논의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 마지막 문장이다. 사실 이 논쟁에 있어 발제문 혹은 복음학교 측 반론 그 어디에도 이 마지막 문장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문장에 복음적 회개의 영적인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15장 6절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그것에 근거하여 그와 화해하고 사랑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who are thereupon to be reconciled to him, and in love to receive him)."

생명에 이르는 복음적 회개의 결과는 분열도 아니요 남을 깔아뭉개거나 수치심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적 회개의 결과는 공개적인 죄 고백을 한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간에 우월감이나 열등감 혹은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도 아니요, 공개적인 죄 고백을 하지 않는 기성교회를 무차별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 6절 마지막 문장이 선포하고 있듯이 생명에 이르는 복음적 회개의 결과는 ‘화해’요, 서로 ‘사랑’함이요, 하나의 공동체로의 ‘수용’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머리로 가진 한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는 서로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사랑으로 화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만약 회개를 함에 있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그 회개는 옳은 회개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생명에 이르는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너무나도 귀한 영적인 선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선물은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전제 하에서만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1차적으로는 지역 교회이지만 더 큰 틀에서 조망할 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모든 교회 즉 보편 교회를 뜻한다. 회개를 통해 다른 교회가 상처 받고 아파한다면, 회개를 통해 다른 교회 구성원들이 깨어지고 상처 받는다면 그 회개가 과연 하나님과 교회 앞에 덕스러운 회개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5장이 말하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질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것이 사적인 죄 고백이든 공적인 죄 고백이든 막론하고 회개는 질서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과 40절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질서 있는 것이 곧 화평이며 그것이 곧 품위이다. 회개에 대한 논의 가운데 질서, 화평, 품위, 덕, 사랑, 화해 등이 키워드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나가는 말

김성한 목사와 박형택 목사가 발제한 발제문들은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사안 이외에도 김 선교사 측 주장들 속에 담겨진 다양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지적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안과 더불어 그 외의 지적 사항들을 면밀히 읽으며 느꼈던 생각들을 인상 비평과 신학적 비평으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분석문을 마치도록 하겠다.

첫째, 발제문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 비평을 하도록 하겠다. 발제문들의 많은 부분들이 김 선교사와 그의 관련 단체들의 용어 사용에 있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적절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복음,” “견고한 진,” “일곱 가지 산,” “24365 기도,” “영적도해사상,” “땅밟기,” “원형,” “무소유,” “완전 헌신”과 같은 용어들은 정확한 의미가 규정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가 용어 사용에 있어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론에서 살짝 용어를 비틀어 사용하면 바로 '삼위일체 이단'이 되기 때문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바른 용어 사용에 있어서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다.5) 그러므로 바르고 성경적인 용어를 적실한 신학적 근거와 함께 설득력 있게 사용하는 것이 논쟁 당사자들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사실 정통 기독교 교회 내에서도 비(非)성경적인 혹은 심지어는 반(反)성경적인 용어들을 아무런 고민 없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정통 기독교 역시 용어 사용에 있어서의 자아 반성이 필요할 듯하다. 또한 이러한 논쟁들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배우는 시간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물론 진리의 측면에서는 엄밀하게 배타적이 되어야 한다. 진리가 아니면 비(非)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야말로 양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 이외의 문제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점들을 배우는 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상태에서 논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

둘째, 발제문 내용들에 대한 최종적인 신학적 총평을 하면서 본 분석문을 마치도록 하겠다. 결국 발제문이 주장하는 바는 김 선교사와 관련 단체 측의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행태와 기성 교회를 향한 태도도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특정 인물 혹은 특정 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존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교리와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교리가 잘못되었다면 삶은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삶이 어그러져있다면 그 사람의 교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노정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열매로 그들을 아는 것이며, 행한 대로 갚음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은 행위로 고양되는 것이 아니며, 열매가 바른 나무를 만들 수 없는 것이며,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이는 칭의와 성화, 교리와 삶, 믿음과 행함, 나무 됨됨이와 그 나무의 열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동시에 그 관계 속에서 우선순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 논쟁을 통하여 논쟁의 당사자인 양측 모두 다, 혹은 이 논쟁을 우려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교리에 문제가 있다면 과연 자기가 가진 교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지한 반성적 고찰이 필요하며, 삶과 태도에 대해 공격을 받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실천적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고찰해야 한다. 공격하는 이는 공격하는 자기 자신의 신학적‧실천적 ‘들보’(눅 6:42)를 먼저 고찰해야 하며, 방어하는 이는 공격 받는 이유에 대한 진지한 자기 고찰이 있어야 한다. 이는 공격과 방어의 위치가 서로 바뀌더라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이다. 이렇게 될 때야 비로소 이 논쟁이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소모적 논쟁 혹은 교조주의적 마녀 사냥 식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복음의 편만해짐을 좀 더 앞당기는 복된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귀한 사안과 논쟁 가운데 함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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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1)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의인 박재은,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하나님의 주권 대 인간의 역할, 그 사이에서 바라본 성화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84-98을 참고하라.

2) 결정적 성화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박재은,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118-141을 참고하라.

3) “As every man is bound to make private confession of his sins to God, praying for the pardon thereof; upon which, and the forsaking of them, he shall find mercy; so, he that scandalizes his brother, or the Church of Christ, ought to be willing, by a private or public confession, and sorrow for his sin, to declare his repentance to those that are offended, who are thereupon to be reconciled to him, and in love to receive him.” Philip Schaff, 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n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3 vol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19), 3:632-633.


4) Schaff, ed.,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3:631.

5) 이에 대한 필자의 논의로는 박재은, 삼위일체가 알고 싶다: 잘못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탈출하라 (파주: 넥서스CROSS, 2018), 121-149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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