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선교사 공청회_3. 박형택 목사 발제
김용의선교사 공청회_3. 박형택 목사 발제
  • 성경과삶이야기울림
  • 승인 2018.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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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한 공청회 발제
합신이단연구소 소장 박형택 목사
△김용의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한 공청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박형택 목사(합신이단연구소 소장)

순회선교단 대표였던 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한 공청회가 예장합신 총회(총회장 박삼열 목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유영권 목사) 주관으로 지난 6월 7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그레이스홀에서 개최됐다.


예장합신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김용의 선교사와 복음학교에 대해 △2014년 4월=합신 수원노회에서 김용의 선교사에 대하여 조사를 청원, △2014년 9월 총회=신학위원회로 보내어 조사하기로 결의, △2014년 9월 총회=신학위원회 보고를 참고로 받기로 하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 보내어 연구 보고하기로 함, △2016년 9월 총회=판단을 1년간 유예하기로 함, △2017년 9월 총회=김용의 선교사에 대한 공청회를 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진행됐다.

다음은 합신이단연구소 소장 박형택 목사의 발제 내용 전문을 녹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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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택 목사(합신이단연구소 소장)
△박형택 목사(합신이단연구소 소장)

원래 이단연구는 이단을 만들고, 정죄하고, 하던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고, 세워지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순회선교단은 저는 잘 몰랐지만, 김용의 선교사의 유투브 강의를 들으면서 참 대단하다, 열정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만. 합신에서 연구해야 할 당면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순회선교단 김용의 선교사가 지금까지 해왔던 내용들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강의한 내용, 인터넷에 있는 내용, 책자들을 있는 그대로 가져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에 대한 문제, 회개와 믿음에 대한 곡해

김용의 선교사는 일단 신학을 안하셨으니까. 원래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점도 많이 판단되지만, 일단 제가 느끼고 판단한 바를 정리하겠습니다. 복음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굉장히 ‘복음’에 대해서 강조한다. 좋잖아요. 그런데 전체 내용을 들어보면, 복음의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하는데. 사실은 죄에 대해서,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가 잘 안됩니다.

모든 이단들이 다 그렇지만, ‘죄’에 대해 강조는 하는데 사실은 죄가 도대체 뭐냐, 근본적인 문제가 뭐냐에는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간음, 음란, 폭력, 낙태, 동성애, 중독, 사기 등 죄가 많이 거론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은 다루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복음의 내용과 복음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사람이 되셔야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말하지만,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얘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왜 부활을 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별로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 강조하지만 뭐가 믿음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고 강조만 할 뿐 내용이 없습니다.

또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저도 이단을 연구하지만 이단마다 구원이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구원파가 말하는 구원이 다릅니다. 신천지가 말하는 구원도, 지방교회가 말하는 구원도 다 다르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지 않나?’ 생각 듭니다. 잘못된 것만 나열하겠습니다.

‘믿음’에 대해 강조하지만 뭐가 믿음인지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회개와 믿음에 대한 곡해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이해부족입니다. 회개를 ‘공개자백’으로 대체되는 느낌을 제가 받았습니다. 실제로 회개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어요.

“행위는 율법을 지키지만 자기 절망에 빠진 자가 오직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다가서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에 대한 오해가 있지요. “절망 가운데 그냥 받은 것이 믿음이다. 내가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결단을 요구합니다.

본래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 반드시 구원에 필요합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이 없지요. 그런데 회개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죄의 고백이 회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 것이 상당히 많이 염려가 됐습니다.

 

◇나의 복음에 대한 문제

두 번째 나의 ‘복음’에 대한 문제인데요. ‘총체적인 복음’, ‘완전한 복음’, ‘영속적인 복음’ 굉장히 많이 논해요. 도대체 왜 이런 얘기를 할까? 왜 총체적인 믿음/복음을 얘기하는가하는 데.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근데 제 느낌이 그걸 딱 들으면서 복음의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할지라도 기성교회는 이런 복음이 없습니다.

오직 순회선교단에 와야 들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복음은 변화되지 않고는, 깨닫지 못한다. 순서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아야 믿고 변화를 받는데. 변화가 먼저 인가, 깨닫는 게 먼저인가? 복음은 깨달아야 변화를 받게 됩니다. 어느 게 먼저입니까? 바뀐 거 아닙니까?

또 하나는 ‘공개 죄 자백 시간’이 ‘나의 복음 시간’이다(?) 복음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거의 다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복음’이 뭘까요? 나의 복음은 나의 구원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을 보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의 복음 시간”이라 하는 데 “공개 죄 자백 시간”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완전한 복음, 온전한 믿음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셨는데. 복음은 이루어 가는 것입니까?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복음입니까? “온전한 복음. 온전한 믿음만이 복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큰 믿음도 있고, 작은 믿음도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원자 선별기준의 문제

복음학교에 들어갈 때, 지원자를 선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일 궁금합니다. 또한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뭔가 은밀하게 행하는가? 본인은 아닐지라도 이단들의 특징이 외부와 차단하는 게 특징이잖아요.

왜 강의 내용을 비밀로 하는가? 왜 복음학교는 복음 자체만을 전한다면서 선별한 사람들만 들여보내는 것은 순회선교단 사람들을 만들기 위함인가? 선별된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알 만한 사람들,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별된 사람들에게 왜 ‘다시 복음 앞에’라는 것을 가르치는가? 나중에 답을 좀 해주십시오.

복음학교에 들어가는 자격과 조건이 무엇인가? 왜 그들만의 자격을 갖고, 그들만의 공간에서 생각할 때 이단들의 습성과 너무 똑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습니다.

 

◇극단적·자극적인 용어 사용, 결단요구

그 다음 극단적인 용어 자극적인 용어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피 값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편히 살다 죽겠는가?” 이러면 사람들이 굉장히 도전을 받자나. 그렇지요? “그리스도인이여! 자연사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여러분, 그냥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복음을 가진 자는 다 가진 자다.” 그러니까 무소유가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나는 걱정이네. 집도 있는데. “예수님을 따라 오려면 (다 버리고), 예수님이 대가를 분명히 지불하셨다.”

“복음 앞에 서라, 복음 앞에 목숨을 걸어라!” 순교자의 정신을 강요하는데. 이단들이 특별히 순교자의 정신을 강요하잖아요. 신천지 청년들 모이에 가면, 그러잖아요. 순교자의 정신으로.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은혜 받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포기하라는 것은. 변승우 목사를 보면, 청년들이 선교가기 위해 직장도 포기합니다. 인터콥도 유사합니다. 복음을 책임지지 않고 “핏 값을 내가 치러야한다.”는 것은 자극적입니다. “나는 죄의 짱아치, 죄의 원형이다”(?) 다 죄인으로 보이네요. 다 죄인으로 보여요. “용감한 자는 한 번 죽는다. 비겁한 자는 계속 죽는다.” 자극적인 표현들이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선동적인 용어가 아닌가, 안타까운 부분이고요.

 

◇공개 죄 자백의 문제

왜 복음학교에 갔다 온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나의 복음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죄 고백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개자백이 나의 고백인가? 복음학교를 갔다 온 사람들이 “복음학교에서 하이라이트는 ‘나의 복음’ 시간이었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구원 받은 복음을 간증하는 시간인지, 죄를 고백하는 시간인지? 종이에 적어 방별로 나누어서 모인 자리에서 각자 나의 복음을 낭독하여 나 자신이 마치 나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나의 죄를 드러내 놓아야 하는 곳. 우리 반 80명은 준비된 10개의 의자에 희망순서대로 앉아 강단 위에 올라가 1명씩 각자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복음학교 수료자의 제보)라고 기록했어요. 이것이 복음 시간인가? 아니다. 1907년, 일렬로 서서 고백했습니까? 아니죠? 죄책감을 받은 사람들이 은혜 받아 자기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지체가 일렬로 서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아니었지 않나?

“공개 죄 자백을 하는 것이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들을 해요. 그게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야할 것이 있는가요? 공개 죄 자백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가짜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공개자백을 통해 자신이 죄의 원형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자기 환멸에 빠지게 만든다(?) 자!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환멸에 빠지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인가? 이게 잘하는 것인가? 비밀을 공개하면 마귀가 공격을 못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

십자가에 대한 오해의 문제가 조금 있었어요. “하나님의 인간 창조 시에 꿈꾸던 것이 원형이다. 타락 후에 그 원형을 상실했는데, 예수께서 우리의 원형을 회복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그 후에 성령께서 그 원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강림하셨다”(?) 여러분, 잃어버린 원형회복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지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 말씀하시기를, 창세전에 아버지가 가졌던 디자인하셨던 대로, 저희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내가 죽겠나이다라고 이렇게 기도했다(?) 창세 전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의 원형이요, 하나님의 비전이다”(?) 이러한 원형문제가 조금 오해 된 문제라 생각이 됐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깨어진 하나님의 원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우리의 원형이 다 회복이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내 죄로 맞바꾸신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다 통과하셨으니까”. 그런데 골로새서 3장 1~10절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통과해 버렸다. 사실 이것은 십자가 통과 문제가 아니라 부활문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이심을 당하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까.”

이건 부활문젠데 십자가 통과문제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부분이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죄에 찌들어 살던 병든 자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 이름표를 달고 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다(?) 내 이름을 달고 함께 죽었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을 때 우리도 함께 죽으셨고, 함께 살아난 것은 사실인데. “내 이름표를 달고...” 굉장히 멋진 표현 같아요.

그다음에 십자가가 생명이다, “오직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는 변화의 열쇠이다. 십자가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다. 살아있는 십자가로 믿음을 가지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십자가 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입니까? 잘못된 십자가 신앙에 빠지면 십자가가 우상이 되지요. 우리는 십자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중요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중요하잖아요. 근데 너무 십자가에다 하다 보니까. 마치 십자가 우상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시니까요.

 

◇영적도해사상, 땅밟기 기도의 문제

순회선교단에서 또 다른 중요한 사상은 영적도해사상, 땅밟기 기도. 아마 『그리스도인의 땅밟기 기도』는 스티븐 호손 이라든지 여러 사람이 쓰기는 썼어요.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순회선교단은 매년 여름과 겨울에 땅밟기 기도 원정대를 구성해 수 십 개국 선교현장에 파송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순회선교단 순회선교사의 기자 인터뷰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땅밟기 운동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 잘 아시죠? 아시지요? 영적도해사상으로서 한국의 베뢰아, 김기동, 신사도운동에서 나온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선교다 이런 이단적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이교적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요. 영적도해사상은 잘못 된 사상이다.

말씀기도, 땅밟기 기도, 24365, 느헤미야 52기도. 다양한 기도를 하고 있는 데. 24-7 이것은 신사도운동, 빈야드, 켄서스시티 예언자 그룹, 윌리엄 브레넘의 늦은비운동 등은 다 이단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거기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이 마이클 비클 입니다. 비클이 24-7 기도운동을 만든 사람인데 이것을 만들어 차용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직통계시를 받아가지고 창설했는데, 적용을 한 것 같아요.

 

◇중보기도의 문제

순회선교단의 열방을 위한 거룩한 전진이 땅 밟기라고 하는데. 이 비전트립이 땅밟기 기도원정대라는 팀을 통해 행해지고 있습니다. 땅밟기 기도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인터콥 청년들이 인도사원 앞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 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됐습니다. 봉헌사에 가 가지고 예수 믿으시오 찬송하다가 잘못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땅밟기 기도는 이교적인 사상이고, 이단적인 사상 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보기도학교에 대해서. 여러분, 중보자는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자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중보자라는 말을 쓸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신사도 운동에서 나온 잘못된 것인데요. 그런데 중보기도 원정대에서 나온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첫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을 일하게 하시는 키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중보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중보자의 신분을 예수님의 자리에 세우고 있습니다.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홈페이지 가서 보니까. 열방기도센터에서 실제에서 제2번, 중보자로서 준비되어짐의 내용 가운데 임마누엘 하신 주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의와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의 자리에 믿음으로 섭니다.

인용구절이 있어요. 디모데전서 2장 5절. 중보자. 하나님도 한 분이시오. 중보자도 한 분 이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다. 이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는 그런 얘깁니다. 신사도운동에 동일시 기도가 있는데,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기도를 한다는 거예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이 기도하는 것으로 만드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도 중보자도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중보자의 자리에 성도들을 세우면서 예수님의 자리에 앉히는 거잖아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잘못된 사상이다.

중보기도자의 특별한 영성을 내세우고 있죠, 중보기도자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7가지 문화영역과 7가지 기도로 개척할 영역을 나눈다(?) 굉장히 중보기도자가 중요합니다. 신사도운동에서 중보기도자는 아주 특별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7가지 문화영역은 신사도운동의 7가지 권역을 얘기하는 것인데요.

중보기도의 방법 전략으로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영적전쟁과 영적도해를 차용합니다. 견고한 진 문제가 결국은 가계저주론과 조상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잘못되고 위험한 사상이다. 중보기도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심어주고 중보기도자를 통해 이뤄 가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된다. 내가 예수가 돼서 바라보면 보인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을 여기는 것이 중보기도의 첫걸음이라고 어느 선교사가 주장합니다. 주님 외에 중보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기에 중보하시죠.

 

◇신사도운동 사상이 많다.

첫 번째, 중보기도의 문제. 두 번째, 견고한 진 문제. 세 번째, 일곱 가지 산, 혹은 영역문제입니다. 정치, 경제, 미디어, 예술, 문화, 교육, 종굔데요. 이 7가지 권역을 지배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 신사도사상인데요. 의도도 모르고 가져와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네 번째, 24365 기도 문제. 다섯 번째, 영적도해사상, 땅밟기 운동. 이런 것이 신사도운동과 연관돼 있는 건데 순회선교단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순회선교단과 관계한 기관들을 제가 쭉 봤는데. 신사도 운동과 연관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짜깁기 했다.

저는 이거는 인정을 합니다. 김용의 선교사가 평신도잖아요. 신학을 안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나름대로 인용하는 데. 전혀 성경의 내용과 다른 것을 그냥 인용해요. 제 생각에는 뭐하냐면 이단들이 하는 짜깁기하고 똑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도행전 18장 24절에 보면, 아볼로 얘기가 나옵니다. 근데 뭐라고 설명을 하느냐면, “복음에 대한 무지함으로 인한 혼동을 지금 아볼로가 일으키고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복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아볼로가 복음에 혼동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세례요한의 세례 밖에 몰랐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가르쳤잖아요. 또 에티오피아 구스 내시도 혼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몰랐지. 이사야서를 읽다가 모르니까 빌립이 알려줬잖아요. “누가복음 18장 18절. 부자 관원에 대해서도. 주님이 청년의 마음 중심에 변화를 요구했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이런 내용을 보면, 성경을 인용하는데 전혀 본문 내용과 다른 것들을 해석을 하다 보니 마치 제 눈에는 성경을 너무 많이 짜깁기했다고 보여 집니다.

“로마서 14장 8-9절. 말씀처럼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을 주님이 요구한 것인가? 눅 7장 23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갈등”인가, 구원 받은 후에 성화과정의 갈등의 문제인가?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갈등 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사라는 말씀이. 창세전에 우리를 비전하시고 창조하셨다는 말씀인지. 고린도전서 5장 17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이,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 수준으로 존재 자체가 변했다.”는 뜻인가? 너무 성경을 오용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생명책이 심판책입니까? 요한계시록 20장이 생명책이 따로 있고, 죄의 기록부가 따로 있다. “원소 분해된 죄를 재생해서 인격체로 재현한다(?) 시편 7편 11절. 하나님의 본성상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3장 19절.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한 선택이었다”(?) 여러 가지 왜곡된 인용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2-9절. 모세가 놋뱀을 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보던 자들은 살더라”는 말씀에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향한 여호와를 바라보라. 가만히 서 있어야 할 때 방정떨지 말고 가만히 서 있어라. 그대로 기다리라. 십자가로 준비된 완벽한 복음이 있다.” 이런 말입니다. 성경 짜깁기해서 갖다 붙인 것들이다.

 

◇무소유, 위험한 헌신의 문제

김용의 선교사님은 무소유의 삶을 서원하고 강조해서 사람들이 따라하는 것 같아요. 무소유에 대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차라리 중이 되지 그랬나 싶다. 불교에서는 무소유의 삶을 주장하잖아요. 물론 의도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것은 칭찬해야될만한 일이지요. 그 다음 자신의 자녀들을 선교사로 서원한 것을 말하면서, 운명적 선교사로 만드는 데. 운명적론은 기독교사상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려는 자에게 주님이 대가를 비싸게 제시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 때 당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얘긴데. 누구나 예수님을 따라오는 자에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요. 또 피 값을 받은 사람들이 어찌 편히 살다 죽겠는가? 주님이 이것을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까? 쪼금 헌신을 강조하다면 이런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위험한 헌신론이다.

 

◇믿음에 대한 왜곡의 문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실재를 대하는 원리다”(?) 믿음이 원리인가요? 믿음을 원리로 이해하면 위험하잖아요. 믿음은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잖아요. 관계 문제입니다. 관계. “믿음은 보이지는 않는 손길, 믿음은 보이지 않는 진리, 보이지 않는 실재에 대한 원리이다”(?) 믿음은 원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의 반대개념이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한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절대 행함은 믿음의 반대개념으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정신통일이 아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이며, 그분이 내게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습까? “행위는 율법을 지키지만, 자기 절망에 빠진 자가 오직 처분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것들은 조금 왜곡된 믿음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절망가운데 그냥 받는 것이 믿음이다(?) 최선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맞습니까?

“행함은 나로부터이지만 믿음은 하나님께로 부터이다”(?) 맞습니까? “믿음은 행위의 반대개념으로 믿음의 가장 위험한 적은 최선이다(?) 믿음의 주소는 마음이다. 복음이 복음 되려면 자아를 처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면 자아를 처리해야만 믿음이 생깁니까? 이런 표현들이 상당히 왜곡 된 믿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내 손가락 하나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움직일 수 없다고 자포자기할 때 하나님의 절대 은총이 임한다”(?) 그냥 믿음은 하늘에서 받는 것이라면 우리 인간은 책임이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써 회개와 믿음은 절대 인간의 책임입니다.

 

◇왜곡된 죄론과 타락의 문제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주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됩니다.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의지하며 산다는 것을 바꿔버렸다. “죄가 생명에 침투되어 죽임이 왔다(?) 생명 문제가 생긴 것이다”(?) 여러분, 죄가 생명에 침투해서 죽음이 왔습니까?

죄를 인격화 시키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죠? 죄가 생명과 붙어 있습니까? 죄가 마치 인격체를 가진 것처럼 죄가 인간을 조종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타락한 본성에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죄지. 죄가 우리를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조상 죄 문제와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상관되는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죄가 생명 안에 들어왔다(?) 죄가 성립될 때마다 생명과 인격에서 작용한다(?) 죄는 영적 타락이후 도덕적 타락, 성적 타락으로 이어진다(?) 죄의 속성에는 반역성과 확장성이 있다.” 죄를 인격화 돼서 죄가 역사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는 그 배후에 조종자가 있다. 죄는 죄의 종이다. 아담 이후에 피의 제사가 계속 되었다. 유월절 양은 대속 후에 심판, 남의 집에 피 바르러 다니다가 죽었다”(?) 남의 집에 피 바르러 다니다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거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것도 사명이라 말하는 데 맞는 말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대속의 사건으로 실현된 것이다. 죄는 배후에 악한 음모가 있다.”(?) 이런 것은 죄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왜곡된 성화의 문제

“주님의 거룩이, 곧 나의 거룩이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나는 거룩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와서 예수 안에 있다. 주님과의 연합과의 결과다. 거룩에 대한 목마름이 내 안에서 거룩을 이룬다. 완전한 복음, 완전한 믿음으로 살면 된다.”

“성화론에서 되어간다는 말을 조심하라.”는 말이 강의 내용에 나온다. 문제가 되지 않는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완전함을 온전히 믿음으로 응답할 때, 거룩을 이룬다.”(?) 거룩을 완전하게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주님이 이루신 온전함을 믿고 신뢰하라. 주님의 거룩이 내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거룩함의 시간이며 완성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영접할 때. 거룩함이 완성된다고 표현을 해요. 이미 주님이 이루신 일이다. 우리의 성화는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할 때 이루어지는가? 이것도 기본적인 정통교회에 성화가 이루어가는 과정으로써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곡된 성령론 문제

“예수님의 구속 사역 완성 후에 주의 날, 완전한 복음, 완전한 믿음으로 반응하면, 성령이 복음을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이 오신 목적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안 돼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삼위하나님의 내주 연합이 성령의 내주다”(?) 여러분은 모르시겠지만 이것은 지방교회 사상입니다.

“로마서 8장 6절에서 12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은 성령님만 신뢰해야 성령님이 일하신다.” 성령님만 구하라는 메시지인가? 잘못된 것이지요. 이러한 사상은 삼일하나님이라는 지방교회 사상입니다. 아마 모르시고. 제가 일일이 신학적 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일단은 복음학교 내용과 여러 가지 책자에서 물론 평신도 선교사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정리를 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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